- 친정아버지 제사와 산소 -
오늘은 음력 4. 2. 친정아버지 제사이다.
1977년 5월 20일(양력)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햇수로 30년이 넘은 세월이다.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바로 그 해. 내가 여고 2학년 때,
내 밑의 죽은 남동생이 중 3, 막내 동생이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5학년에
올라가던 해의 일이었으니, 한창 아이들이 성장해나갈 중요한 시기인데다
사춘기 무렵인지라 서른아홉 살의(39세)친정엄마는 남겨진 4남매를 두고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46세)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을 터였다.
해운회사의 소속이었던 아버지는 인천의 연안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막노동 일을 하셨다한다. 새벽 일찍 자전거 뒤에 보온도시락을 싣고,
찬바람을 맞아가며 일을 나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눈썰미가 좋았던 아버지는 이전에 건축일을 하셨고, 그곳에서 익힌
여러 가지 기술을 비롯해서 중장비 기계를 만질 수 있는 재주가
있으셨던 모양이다. 당시에도 그런 중장비 기계를 운전하려면 자격증
같은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들었던 때가 3월 초 무렵이었으니, 학기 초에 시작된
우리집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해 따뜻한 봄날을 내내 우울함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병원 소독 냄새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고
속절없이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 때문인지 속울렁증이
생겼고, 날마다 중환자실과 병원 복도에서 막막하게 기다림에 지치던
그 시절이 뼈아픈 슬픔이 되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학교 가는 길에 도시락을 들고, 하루 온종일
중환자실을 지키던 시골 외삼촌(농사일을 전폐하고 올라오심)에게
갖다 주고, 학교가 파하는 저녁에 병원에 둘러 빈 도시락을 바구니에
하나 가득 챙겨오는 일도 내 몫이었다. 당시만 해도 웬만한 거리는 대부분
걸어다닐 때였으나, 통학 길에 버스 정류장으로 몇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바구니를 들고, 병원과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고 당시, 이웃에 사는 이모님의 전화로는 ‘아버지의 발가락이 조금 다쳤다’
는 전갈이었을 뿐, 그리 심상치 않게 말을 건넸지만, 이모님이 엄마와
오빠만을 데리고 급하게 병원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몸에서 맥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무슨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발가락이 다친 게 아닌, 배의 기중기 사다리 위를 오르다
작업장의 인부의 실수로 뇌를 크게 다쳐 중환자실에 누워있었고,
그날로 대대적인 뇌수술에 들어갔다 한다. 다음날 수술이 잘못돼
재수술에 들어갔고, 의사들이 아버지의 뇌를 연 순간, 수술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닫았다 한다. 워낙에 뇌손상이 큰데다 뼈가 많이 으끄러져서
수술을 할 수없었다고 들었다.
이후, 아버지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셨다.
며칠은 눈동자가 움직여서 뭔가를 말하려는 듯 보였고, 날이 갈수록
초점을 잃은 아버지의 눈동자는 표정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갔고, 욕창으로 등 밑이 썩어갔다.
뚫린 목구멍으로 가는 호수 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으로 음식물과
약물이 투여되었다. 산소호흡기 줄을 비롯해서 칭칭 동여매진 각종 링거액
병들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 반 여동안의 세월을 중환자실에서
식물인간으로 보낸 아버지는 고가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서인지
산재보험 측과 회사측과의 협상으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기로 했고
산소 호흡기를 제거한 아버지는 그날 오후 4시경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산소가 있는 곳은 각 교단의 교회 성도들이 많이 묻힌 곳이다.
아버지는 평소에 교회 다니는 것을 싫어하고, 집에서 예배조차 보지 못하게 하셨다.
어떨 땐, 아궁이에 성경책을 불태워버리고, 나를 다락에 가둬 못나오게 하고,
내 책가방을 숨겨두고, 교회 다니려거든 학교를 다니지 말라고 하면서
자식들까지 교회로 인도한 엄마를 원망하고, 핍박하시던 분이셨다.
지독히도 교회라면 질색을 하시던 분이셨는데,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시기 일주일 전쯤에는 당신 스스로 교회를 나가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다. 교회 산에 묻히시려고 그러셨는지...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심중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결혼 전, 산다는 일이 너무나 힘들고 외롭고 쓸쓸할 때면 가끔씩 아버지
산소를 찾았었다. 오빠와 식구들과 함께 가는 일도 있었지만, 나 혼자서
동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버스 종점인 검단까지 와서 한참을 산책삼아
걸어 올라가면 아버지 산소가 보였다. 묘지 위로는 우거진 숲들이 있었고,
앞으로는 탁 트인 너른 공터가 애잔한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다.
아버지 산소를 갔다 오고 나면 마음이 편하고, 산다는 것에
그리 안달복달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 같아 다시금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가곤 했다.
남편이 결혼하자는 구애를 받게 된 날도, 집을 장만하게 된 시기에도
아버지의 산소를 다녀온 직 후였기에 산소를 다녀오면 공연히 일이
잘 풀리는 것 같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게 느껴지곤 한다.
결혼 후, 딱 한번 아버지 산소를 찾아뵈었던 나는 그동안 사느라 바빠
이후로 한번도 아버지 묘소를 다녀가지 못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아버지 제사에조차 참여하지 못해 늘 마음이 불편했다.
일반인들이야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면 제사를 지내는 일이 당연시하겠지만,
엄마가 교회를 다니다보니 아버지 제사 지내는 일이 문제가 되었다.
교회 다니는 걸 핑계로 그동안 지내왔던 조상의 차례와 아버지 기일을
모른 척, 그냥 지나갈 수는 없어 엄마는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려놓고, 예배를 보고 기도를 드렸다. 엄마는 그렇다 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 자식들은
절을 하기로 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해마다 거르지 않은 채,
아버지 기일을 기억하고 제사를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엄마가 심장병을 앓고 있어 수술대신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약을 갖다 드시고 있고, 심한 골다공증 증세로
무릎과 다리를 쓰지 못해 많이 절룩거리시고, 걷기 힘들어하시는
상황이 되고 보니 아버지 제사 지내는 일이 큰 걱정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마음이 편치 않아 하는 엄마에게 오빠와 나는 이번에는 아버지 제사를
집에서 지내지 말고, 대신에 아버지 산소를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엄마도 몸이 아프다보니 아버지 산소를 다녀 온지가 한참 되었다 한다.
해마다 벌초를 하러 다니는 오빠와는 달리 근 15년 동안 아버지 산소를
다녀오지 못한 나는 죄인 같은 심정이 되어 늘 가슴에 뭔가가 걸린 듯,
묵직한 부담감에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 산소를 찾아보기로 한 날, 나는 아침 일찍 서둘러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친정으로 달려갔다. 농협직판장에서
엄마가 좋아하시는 아카시아 꿀과 꿀대추차를 사서 챙겨갔다.
친정 근처의 지하철역에 다다라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친정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오빠가 차를 갖고 갈 테니
힘들게 집까지 오지 말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는 전화였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대로 빗방울이 조금씩 뿌려지기 시작했고,
하늘은 인상 잔뜩 찌푸리는 우거지상 같은 날씨였다.
오빠 차가 도착하자마자 새로 뚫린 도로를 따라 아버지 산소로
힘차게 달려갔다.
주변에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우거진 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산소 가는 길은 그간 얼마나 커다란 변화가 있었는지 도무지 옛 모습은
찾으래야 찾을 수조차 없었다. 이곳저곳에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를 비롯해
음식점 간판과 큰 건물들이 꽉 들어차고, 차들이 쌩쌩 달려가는
고가도로 밑에 달랑 산소 자리가 쓸쓸한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버스 종점에서 걸어갔던 길 반대편에 자동차를 주차 시키고 나니
바로 아버지가 묻힌 묘소가 보였다. 듬성듬성 키가 자란 이름 모를 잡초들이
강인한 모습으로 쑥쑥 올라와 있었다. 손으로 잡아 뽑으려니 얼마나 억센지
잘못하다간 손을 베일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비석에 써진 아버지의 성함을
마주 대하니 가슴이 울컥해왔다. 얼마 만에 뵙는 것인가?
‘ 아버지 죄송해요. 사는 게 매일 이 모양이라...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제야 찾아 온 걸 용서하세요. 염치없지만... 자손들 모두 건강하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게 도와주세요.’
고 3 수험생 자녀를 둔 오빠는 미리 준비해온 돗자리를 깔고
떡과 과일 등을 차려놓고, 아버지에게 술을 따르고, 묘지 둘레에
술을 부으면서 아버지와 간략한 대화를 나눴다. 오빠와 나는 절을 했고,
엄마는 그대로 앉아 계셔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살아생전 술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로 인해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지난날이 생채기가 되어 떠올랐다. 술을 드시지 않으면 호인도 그런
호인이 없을 정도로 무척 자상하시고 좋은 분이셨는데...
술을 과하게 드시는 날이면 180도로 달라지시는 아버지가
너무나 원망스럽고 미웠던 세월이었다.
황해도 옹진 출신으로 이북이 고향인 아버지는 17살에 작은 아버지와
달랑 두 분하고만 피난을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북한에 부모님과
여동생을 두고 피난 와서 남한에 정착하시기까지 숱한 세월 고생도 많이 하시고,
외로우셔서 그런지 술을 드시면 신세한탄을 하고, 식구들을 괴롭혔다.
그런데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더욱 더 교회에 매달렸다.
주일 낮, 밤 예배를 비롯해서 수요예배, 금요일 철야 기도까지
단 한차례도 빠짐없이 교회 가는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곤 하셨다.
집안일은 미뤄두고, 교회 일에만 매달리는 엄마가 원망스럽고, 기가 막혀
사는 일이 늘 우울했다. 교회 성가대 활동만을 했던 나는 결혼 후,
남편의 뜻과 시댁의 가풍과 시어머님의 종교(불교)를 따라 교회에
적을 두지 않고, 그냥 마음속으로만 하나님을 두고 살았다.
여자에게 있어 친정이란 ‘ 인생의 큰 버팀목 같은 곳’ 이라 한다.
우울했던 성장 배경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나에게 있어 친정이란
‘ 늘 보살핌이 필요한 대상이 존재하는 곳.
암암리에 그런 부담감이 잠재하고 있는...
어쩌면 말하기 참으로 곤란한 슬픈 곳.
가슴에 묵직한 통증으로 얹혀져 있는 갑갑한 곳’ 으로 느껴졌다.
내게는 모질고 질긴 정이 더 깊게 박혀있는 친정식구들 때문에
마음앓이 해야 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연민의 정들이
더 깊게 자리 잡았다. 지금은 내 사는 것도 벅차고 힘들어
여유롭지 못하지만, 형편이 나아지는데로... 아니 조금만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후하게 베풀고 살아가고 싶다.
그간, 뭐니뭐니 해도 집안의 장남인 오빠가 몸 고생,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제야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오빠네가 참으로 고맙다.
앞으로는 식구들 모두 건강하고, 우애 있고, 서로를 챙기고 아끼면서
화목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버지 산소를 다녀오니 정말 마음이 후련하고, 편안하다.
(2007. 5. 19. 토)
(글쓴이: 인샬라- 정원/ 실명: 김영순)
***바닷물과 아버지***
땅 끝마을 끝에서 바라봤던 검푸른 바닷물.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바라봤던
바다 끝 머리에서 퍼져오던
아름다운 노을 서린 바닷물.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파아란 물이 넘실대던
경포 앞바다에서 바라보던 바닷물.
죽음의 사체가 바닷속에 수장되어
형체조차 없이,
바위하나 우뚝 솟아올라 있던
감포 해수욕장에서 바라봤던 바닷물.
내가 태어나고 자란
뿌옇고 잿빛 머금은 어두움을 더많이 닮은
인천 앞 바다 연안 부두를 내려다보던
자유공원 팔각정 위에서 바라봤던 바닷물.
바다란?
내게 있어 씻어 내리지 못할
아픔과 노여움이 서려...
새벽 찬바람과 찬이슬을 맞아가며
자전거에 몸을 의지하신 채
새벽길을 총총히 나가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죽음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던
바닷물의 아픔이 되살아나...
(2001. 11. 3 자. 英順)
* 사진-대부도 바닷가 : 최승헌님 블로그 펌- 주인 허락하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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