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막걸리와 아버지, 음식에 관한 추억담

안젤라-정원 2005. 5. 7. 23:29

 

*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내게도 음식에 관한 이야기 거리와

추억담이 많이 남아있다.

어떤 음식이야기가 나오면 '아. 그랬지? '하는 공감과 함께...


주식으로 하고 있는 보리밥, 가마솥의 콩밥, 밀가루 범벅, 개 떡,

호박부침개, 가는 국수, 호박 칼국수, 김밥, 백숙, 가오리,

뱅어포 고추장구이, 돼지고기 고추장구이, 간장게장, 조청, 식혜,

오이소박이, 호떡과 튀김, 총각무김치, 오징어 회와 소고기회 무침,

도토리묵, 순두부, 심지어 개고기까지...


여러 가지 한국의 음식들은 갖가지 양념맛과 어우러진 본래의

고유한 맛의 고향냄새가 그득하기 마련이다. 나또한 이런 음식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저곳에서 밀려드는 아련한 추억과 함께

맛이 그리워져 올 때가 많다.


엊그제 일요일 저녁 고추장에 양념 넣고 버무린 돼지고기를

볶아먹으면서 옛날 생각이 났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대문 밖에서부터 굴뚝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왁자지껄 웃어대는 아버지 친구 분들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젓가락 장단소리, 매콤한 연기냄새와 함께 피어오르던 고추장에

양념된 돼지불고기가 석쇠에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

한점 입에라도 얻어먹어볼까 싶으면 굽기 힘들어 그나마 한 조각

입에 대기조차 어려웠던 시절에...

"가서 막걸리나 받아와라. 그럼 한입 줄께."


난 다 찌그러진 노란 주전자를 들고 동네 후미진 골목 뒤로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간다. (사실 이때도 술을 제조해서 파는 것은

허가를 받아야 했다. 불법주조 공장이 아닌 주택이었으므로)

컴컴한 뒷방 뒤로 커다란 항아리가 묻혀있고, '후~우울' 저어서

막걸리가 주전자로 그득 받아진다.


쏟아질 새라 조심히 들고 오다가도 주전자 구멍사이로 흘러내린

막걸리를 입에 대고 홀짝홀짝 마셔본다. 짭짤하고, 구수하던 막걸리 맛!

그 맛을 일찍이 터득해버려서일까? 난 술이라면 막걸리밖에 없는 줄 알았다.

조심조심해서 내 깐에는 들고 와도 언제나 흘러넘쳐 버려진 막걸리와

내가 먹어버린 막걸리가 엄마의 눈총을 들어야만 했다.

"그놈의 집은 막걸리를 왜? 그리 조금 주나?" 라는 원망과 함께...


돼지불고기는 까맣게 타버린 것은 아이들 차지.

잘 구어진 건 아버지상에 갖다 놓으면 아버지는 술김에 딸 자랑으로

입에 침이 마르신다.

"자. 자. 노래한번 해봐라."

어른들 좋아하시는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들려드리면 상위에는

용돈이 쏟아진다. 하루의 피곤하고, 땀에 절었던 모든 고단함 들이

그렇게 친구 분들과의 입담과 즐거운 술과 음식과의 나눔 속에

자주 집에서의 파티가 열어지곤 했었다.


아버지는 이후론 머나먼 저 세상으로 떠나신지 아주 오래되었다.

항상 그득하게 충만하게 꽉차있었던 아버지의 그늘이 걷히고...

우리 집은 아버지의 '자리 없음'으로 인한 허전한, 허무한 또 다른

삶의 슬픈 기억들을 많이 자리 잡게 되었다.

 

고추장에 버무려진 돼지불고기를 프라이팬에 볶아먹으면서

옛날 연탄불에 석쇠 올려놓고 은은하게 구워 맛이 기막히게 좋았던

그날에 비하면 지금은 어떤 옛날의 향수적인 그런 맛은 없다.


하지만, 난 이 음식을 먹으면서, 옛날을 떠올리며 많은 걸 그리워한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세월, 다시 만날 수 있는 얼굴,

다시 볼 수 있는 얼굴을 되돌릴 수 있다면...


(글쓴이: 인샬라- 정원, 실명- 김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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