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남편

안젤라-정원 2005. 6. 11. 23:00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10년 후를 바라보고
남편과 함께 살아 온지 어언 18년.
결혼 후, 남편과 떨어져 지내온 일이라곤 삼박4일 정도의 직장에서 실시하는
몇 차례 연수일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나마 직장을 그만둔 이후론 친구들과 일박2일 일정의 낚시모임이나
단양 사는 친구 집에 잠깐씩 바람 쏘이러 가는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 초에 남편은 베트남을 일주일 예정으로 다녀온다고 했으나
차질이 생겨 열흘 만에 돌아오더니 이번엔 중국으로 언제 돌아온다는
별다른 기약 없이 짐을 챙겨 가버렸다.

떠나기 전, 몇 번씩 다짐을 해 둔 게 있었으니 일전의 베트남 여행 때처럼
예기치 않은 일들이 발생할지 모르니 여비를 좀 넉넉히 가져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해두었다. 남편은 중국은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물가가
싸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할 일이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에구. 못 말려~~)

지난번 여행 때 남은 미화 200불과 집에 있던 20불 달러를 비롯해서
조금의 돈을 챙겨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말 한지 몇 시간 후 전화가 걸려왔다.
배를 타기 전, 전화를 했다면서 환전을 미리 하지 못해서 그곳에 가서
돈을 찾으려고 하니 통장에 잔고 부족으로 여유 있게 돈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그러게 내가 뭐랬나? 그럼 전화라도 해주지.’
전화기로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이미 시간은 물 건너간 일이 돼버렸다.

남편이 집에 없다고 생각하니 모든 일이 여유로웠다.
사실, 나는 남편이 집에 있으면 모든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은 이전엔 그렇지 않더니 집안일에도 소소하게 신경을 쓰고,
잔소리를 하지 않나? 수시로 냉장고를 들락거리며 먹을 것을 찾고,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라며 엄살을 부리며 주물러 달라고
주문을 넣지 않나? 손, 발톱, 귀지까지 파줘야 되니...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만큼은 왕과 시녀 사이의 주문만큼이나 신경이 쓰이고
내 하고 싶은 일들은 미뤄둔 채,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 맞춰져야만 한다.
그런 남편이 내 주위에 없다고 생각하니 날아갈 듯이 자유로웠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니... 슬슬 걱정이 되기도 하고, 남들이 흔히
말하는 옆구리가 허전해져 온다. 그런데다 남편이 없으니 밥하기도 꾀가 나고,
대충 끼니를 때우다 보니 무엇보다도 영양실조? 에 걸릴 것만 같았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롭지만 실상은 그다지 자유롭지가
않다. 결혼이란 ‘아름다운 구속’ 이라는 말이 실감난다고나 할까?

남편이 중국에 가고, 집에 없는 동안에 내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하고,
자유로운 시각에 일어나서 가고 싶은 곳도 다녀오고, 보고 싶은 사람들도
만나러 다녀오리라는 일정은 없던 일로 돼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 감기가 보통 독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마에 줄줄 흐르는 진땀이 더운 날씨 탓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온 몸이 물에 젖은 솜방망이처럼 무겁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더니 열이 오르고
목구멍이 콱 막힌 게 기침이 심하게 나는 것이 아닌가?
집에 있는 비상약을 먹고는 ‘하루쯤 휴식을 취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하루 온종일 누워있었지만, 방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든다. 침대에 누워있어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지어다 먹고서야 조금 괜찮아졌다.
온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꾸만 내 몸에 자신이 없어진다. 조금만 신경을 쓰고, 피곤해도 영락없이 몸에서
신호를 보내오는 일들로 인해서 몸도 마음 따라 늙어 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기 잃은 내 모습이 초췌해보이기도 한다.

우리 집은 올 초부터 예기치 않게 다가온 상황에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지난 결혼생활동안 비슷한 경제적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만큼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었기에 더욱 더 말 못할 고민이 큰 것 같다.

곁에 있을 땐, 미운 마음이 수시로 들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상처 주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마음을 접었다 펼쳤다 하는 생각들.
남편의 보이지 않는 구속이 힘들어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은 생각도 했지만...
남편 또한 나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미우니 고우니 해도 악처 하나가 열자녀의 효도보다 낫다고 한다.
하긴, 남편이라는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병들어 꼼짝 못하는 남편이라도 존재하는 것 자체로 가정은 든든하다고 하니...

처자식과 장남의 무게를 질통처럼 짊어지고 가야하는 현실.
그 현실 속에 남편의 안쓰러운 얼굴이 눈에 선하게 보이니 서글프기만 하다.
언제쯤 활짝 웃는 얼굴로 현실의 고달픔을 허허로운 웃음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지금은 모든 게 어떻게 손 써볼 수 없는 정지 상태이다.
남편이 중국에 갔다 온 일이 계기가 되어 좋은 날들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글쓴이: 인샬라-신의 뜻대로, 정원-필명, 실명- 김영순)

* 오늘따라 무척 보고 싶은 남편이 생각나 되지도 않는 글을 주절거린다.
두서없이 적은 글을 양해해주시기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