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생인손과 상처

안젤라-정원 2004. 11. 5. 08:48

-생인손과 상처 -


글을 쓰다보면 어떨 땐 감추고 싶은 마음에 묻어두고 싶은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할 때가 있다.

상황을 설명하려면 자세한 이야기를 곁들여야 되는데,

말하기 싫은 것도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은연중에 사생활이 드러나 왠지 모르게 마음 불편할 수가 있고,

꺼려지고, 갈등하게 된다.

그래도 글을 쓰고 싶은 경우,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는 것.

각설하고...


나는 왼쪽 손등에 바둑알만한 모양과 크기로 손에 데인 상처가 있고,

엄지손톱은 보기 흉하게 나있는 편이다.

엄지와 검지 손톱들은 다 생인손을 앓아 손톱이 빠졌다가

다시 새로 난 손톱을 지니고 있다.


손등의 상처는 아주 어릴 적에 그러니까 대여섯 살 때쯤의

일인가 보다.

집에서 조그만 소규모 공장을 했었기 때문에 늘 부모님이 바쁘셨고,

아이들은 제 각각 동네 마당어귀에서 놀다 들어오곤 했다.


배춧잎이 다 뜯겨져 나간 얼음이 꽁꽁 언 밭에서 해가 지도록

종일 뛰놀다 보면 손등에 시커멓게 때가 절기 일쑤였고,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수도 물과 빗물을 미리 받아두었다가

데워서 쓰는 물로 겨우겨우 고양이 세수 정도나 했을 시절.


추운 겨울, 밖에서 놀다 오면, 건너 방 부엌에는 커다란 가마솥에

물이 벌벌 끓고 있었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의 물을 옮겨다

부모님은 연탄불에 올려놓으시곤 했었다.

 

솥뚜껑을 여는 순간, 튀겨진 물로 인해 손등에 데인 상처를 안고

살게 되었다. 얼마나 뜨겁던지...

간장을 바르면 낫는 다는 소리를 듣고, 데인 상처에 간장을 얹었으나

그 아픈 열기가 가라앉은 건지 뭔지...

그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 외갓집 삼촌 중 한분이 의대를 다니시던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나의 손등의 데인 상처를 보시고, 결혼할 때 꺼리는 사람도

있을 거라면서 수술해주시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남편은 내게 흉터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한 사람이지만,

겉모양의 모습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고,

복인지 모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학급에서 환경미화를 담당하게 되었었다.

외부에서 귀한 손님이 오신다 해서 멀리 역전에 있는 꽃집까지 나가서

꽃을 한 아름 안고 사가지고 왔다.

 

꽃병에 꽂으려는 순간!

친구 하나가 연필 칼을 손에 쥐며 잘 다듬어 주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나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데, 잠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아찔한 아픔이 느껴졌다.

 

잠시 후엔 괜찮은 듯싶어 무심히 지나쳤는데, 그날 오후부터는

몸에 몸살기가 들면서 온몸이 덜덜 떨리면서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손가락에선 열이 나고, 빨갛게 부어오르면서 아프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아픈지 다음날 학교도 못가고, 결석까지 해가면서

‘팔짝팔짝’ 뛰어가며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땐 손가락 아픈 거 하나 가지고, 병원을 찾는다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없던 시절이었다.

연필 칼에 묻은 연필심 독이 피부를 뚫고, 들어간 일종의

' 파상풍' 이었는데 손톱이 빠져서 새로 나기까지 얼마나 불편하고,

아팠던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든다.

 

한 달 후엔 학교에서 미술준비물로 대나무를 가지고 오라는 적이

있었다. 학원가는 길에 한 상가에서 대나무를 얻었는데, 너무 커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크기로는 불가능해보였다.


할 수없이 밤에 몰래 부엌으로 나가 부엌칼을 들고, 대나무의 중간쯤에

대고 반을 갈라보리라 작정하고 들이대는 순간!

검붉은 피가 갑자기 거꾸로 치솟는 것이었다.


마음은 급하고, 피를 보니 정신이 없고 부모님께 혼날 생각에

미처 아프다는 소리도 못했다. 몰래, 마른행주에 손을 둘둘 말고,

피를 멈추게 했다. 그리곤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이후엔 반쪽만 손톱이 빠져서 근처에 사시던 이모부님과

이종사촌오빠가 내 양팔을 붙들고, 남은 반쪽의 생손톱을

생으로 뽑는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야 간신히 나머지 손톱을 뽑아내서 새 손톱이 자랐지만

손톱 모양이 보기 흉하게 자랐다.


여름한철 갑자기 쏟아져 내린 비로 인해 동네어귀엔 전철도 다니지

못하고 물난리로 집들이 침수하던 때가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할머니에게로 데리고 와 키운 지

얼마 되지 않는 미숙한 엄마노릇에 언제나 힘들어했던 시절.


안방에 TV를 켜놓고 아이에게 혼자 보라고 한 후, 저녁 준비로

김칫국을 끓이려고 김치를 잘게 다지던 순간이었다.

안방에 있던 아이가 징징대며 자주 칭얼거렸다.

귀로는 아이 울음소리에 신경이 쓰였는데, 그 순간, 손톱 끝이

잘려져 나가는 아픔이 느껴졌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나는 아이를 둘러업고, 급하게 병원을 찾았다.

병원응급실에 갔지만, 거꾸로 들고 있으라고 말만 할 뿐,

의사선생님이 출근을 못하셔서 안계시기 때문에 치료를 못하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라는 소리를 했다.

한참을 걸어서 피가 나는 손가락을 움켜쥐고, 다른 병원으로 가서

항생제 주사를 맞고, 치료를 하고 약을 지어 가지고 왔다.

안경을 쓰고 아이를 업고, 달래고 보살피다보면 행동이

거추장스러워 안경을 찾아 쓰지 못해서 실수를 한 것이었다.


그날 밤엔 우리가 살던 일층의 상가들이 방이 딸린 안쪽까지 모조리

물에 잠겨 한바탕 물을 퍼내고 난리가 났었다.

나는 아이를 업고, 남편은 그들을 도와 살림을 날라주고,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몸이 ‘오슬오슬’ 한기가 돌고

추위가 몰려드는 것이었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지만 그 병원도 일층이 침수되어 병원업무를

보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병원에 가서, 또 주사를 맞고, 일주일분의 약을 타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나는 임신 중이었던 것이다.

출혈이 보여 병원에 갔더니 임신초기인데, 유산기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였다. 고민 끝에 아이를 유산시켰다.

손톱이 빠져 다시 새로 나고, 아이도 유산시키고, 나는 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한동안 음식준비를 하다가 칼을 보게 되면 섬뜩한 칼날을 보고는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모른다.

몇 차례나 폭풍같이 몰아치던 아픔 때문에 손을 ‘덜덜’ 떨며

울어 버린 적도 있었던 가슴 저린 생인손의 아픔.


지금은 남겨진 상처를 바라보며 아픔을 잊었지만, 한때는

너무나 많이 아팠음에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모든 아픔은 차츰차츰 옅어지나 보다.

그렇게 아팠음에도 불구하고선...


(글쓴이: 인샬라-정원 (필명), 실명- 김 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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